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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9 연말연시 염장단편, <오래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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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염장단편, <오래된 기억>
네, 염장입니다.
더 이상의 무슨 설명이 필요하십니까.
제가 솔로여도 연말연시하면 자고로 염장 아닙니까? 그러니까 염장 가는데 왜여ㅗㅗㅗ
....는 농담이고. 여튼 연말연시 분위기에 맞춰 질러본 단편 오래된 기억입니다.
주인공은 에메랄드 콘체르토의 주인공 령현의 고모=령현의 아버지의 여동생, 주시윤과 그 남편 류수영이에요. 중간에 수영의 한문이 바뀌었는데 오타 아니고 그걸로 변경할겁니다.
참고로 시윤이 두 살 연상입니다. 근데 날려먹기 전엔 그게 있었는데 잘못하고 날려먹어서 다시 쓴 지금 업데이트 하는 이거엔 그런 거 없어요 흑흑.
좋았던, 나빴던 2012년 잘 마무리 하시고, 새 마음, 행복한 마음으로 2013년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한 해의 끝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어젯밤, 소복하게 쌓인 눈 때문에 시윤은 나갈 궁리를 접어야만 했다. 집안에 떨어진 상비약들을 사러 나갔어야 했는데, 이 마을에 있는 의사도 슬슬 골골 되는 나이가 되어 한동안 의원을 열 수 없게 되었고(정확한 원인은 빙판길에 넘어져 꼬리뼈를 다쳤다고한다), 그나마 제일 가까운 의원집을 찾아가자니, 기가 막히게도 얼마 전 이 마을을 떠나 하필 남은 의원이 방금 전 그 골골대던 노인뿐이었던 것이다.
운영은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조금씩 말을 꺼내기 시작했고, 제일 심각했던 팔의 화상도 서서히 새살이 돋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움직이는 것이 불편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닌지라, 시윤은 오늘도 그를 챙기기에 바빠야만 했다. 계획대로라면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산골짜기와 진배없는 이 곳에서 무언가를 구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심지어 이번 달에는 오빠인 주시호도 집에 없었다. 장원급제했으니 한동안 들어올 수 없다는 것과 심각하게 다쳤음에도, 어쨌든 사내놈이 여동생과 단 둘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시호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시윤도 이해하고있었다.
“눈이 온 모양입니다.”
사랑방에서도 제일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는 한 사내, 본명을 알 수 없던 시윤과 시호는 이 사람의 진보라색 머리카락을 보고 자운영이라는 임시방편적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자주색 구름 그림자. 자라는 성은 시호가, 운영이란 이름은 시윤이 지었었다.
“네, 나갈 수가 없어요. 붕대를 사와야 하는데… 미안해요.”
자신을 보고 있지만, 어쩐지 그 뒤편의, 혹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무언가를 보는 듯한 그 허망한 눈빛이, 마치 구름이 만들어낸 그림자 밑 세상 사람 같아서였다.
혹은, 구름과도 같이 사라질 사람이라는 직감 아닌 직감이 운영이라는 이름을 짓게 하기도 한 탓이었다.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오늘은 딱히 진물도 많이 나는 것 같지도 않”
“어쨌든 나고 있잖아요. 태우려고 했던 것들이라도 지금 빨아서 새 걸로 가져올 테니, 기다려요. 아침은요?”
운영은 몇 번이고, 시윤의 이런 강단 있는 모습에서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누군가와 겹쳐 보여서 조금은 괴로운 표정으로, 하지만 시윤에게는 들키지 않게 미세한 변화만을 줄 뿐이었다. 다만 그 미세함이 시윤의 매서운 눈매를 벗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실은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태우려던 붕대를 빨아 다시 써야 하는 지금, 그녀에게 일거리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은 게 그의 마음이었다. 약간 의심스러운 눈초리였지만 시윤은 아무 말 없이 사랑방을 나갔고, 운영은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양팔이 골절된 것도 모자라 왼팔은 심각한 화상, 더구나 얼굴 왼편까지도 화상을 입어 굉장히 흉측한 자신의 모습을 운영은 알고 있었다. 본 적 없더라도, 얼굴에서 흐르는 따끔함과 아픔, 진물들이 대변하고 있었고, 양갓집 규수라면 으레 까무러칠지도 모르는 그 흉터를 시윤은 아무 말도 없이,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늘 붕대를 갈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전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었을 자신을 위해 매일 쉬지 않았다. 귀찮다는 말도, 마음도 본 적 없었다. 처음에는 외간 남자라는 점과 처음 해보는 일이라 영 어색하고 서툴렀지만, 2개월이나 지난 지금은 말 그대로 익숙해져 있는 상태. 그 사이 오른팔의 골절은 다행히도 서서히 나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감사하면서 또한 운영은 간질간질한 또 다른 마음을 마주하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연정이라고 하는 그것. 기억을 모두 잃었지만 운영은 그 마음이라고 직감했다. 헌신적인 면모와 그 내면의 따뜻함, 그리고 웬만한 남자들보다 현명하고 강단 있는 면을 그는 이곳에 와서 수십 번도 더 보았다.
“꺄아악!”
우연히도 시윤을 생각하던 차에 운영은 높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시윤의 비명에 아픔도 잊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곧바로 고개를 틀어보니, 사랑방 오른편에 부엌 앞에 시윤이 주저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요. 네. 괜찮으니까…….”
들어가 있으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운영은 그럴 틈도 없이 어딘가 다친 곳이 없나 꼼꼼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외견으로 봐선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결국, 치마폭을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들춰내자, 막 넘어졌음에도 퉁퉁 붓기 시작한 접지른 발목이 보였다. 급격하게 굳어가는 운영의 표정과 달리, 시윤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다른 곳은?”
“네?”
“다른 곳은 다친 곳 없으십니까? 발목 말고.”
“네, 없는 거 같아요.”
외간 아녀자의 치마를 마음대로 들친 것에 대해서 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발목이 생각 외로 너무도 아팠고, 어쩐지 그가 나올 수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없는 안도감 비슷한 걸 느끼기도 한 것 때문이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네… 네? 엄마야!”
성치 않은 왼팔, 왼팔보다 상황은 낫지만 역시 조금은 통증이 남은 오른팔로 운영은 시윤을 들어 올렸다. 절대 사람을 들어 올릴 상황이 아닌 것을 시윤은 잘 알고 있었고, 당장 내려달라고, 걸을 수 있다고 입을 열려고 하자,
“더 심해지면 그 때는 어쩌시려고 합니까?”
“어차피 저 앞이잖아요. 그러니까……”
“저 앞이던 어쩌던 모릅니다. 그 사이.에 또 넘어지기라도 하시면 어쩌시게요?”
그 말에 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은 추위 때문인지 혹은 안겨져 있다는 것 때문인지 모르게 새빨개진 채로 몇 걸음도 채 되지 않는 대청마루로 사뿐히 옮겨져야만 했다.
“눈이 와서 얼음찜질거린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근데 방 안은 역시 못 들어갈까…”
가만히 앉아있는 시윤을 흘끗 보고, 운영은 얼음찜질할 주머니를 부엌에서 찾아 다시 앞마당으로 나왔다.
의식하려고 하진 않지만, 시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건 왜인지 알 수 있었고, 겨우 얼음 좀 담는 일임에도 그녀의 희고 고운 피부, 옥처럼 빛나는 머리칼, 깊은 그림자를 만들 것 같은 긴 속눈썹과 그 아래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 오똑하면서도 끝이 예쁘게 동그란 코까지 하나하나 생각이 나서 쉽게 집중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운영은 기억이 없으므로 알 수 없었다. 주시윤이란 여자는 그 외모 때문에 보옥 12가 모두가 탐내 하는 무척이나 어여쁜 아가씨라는 것을. 비록 지금의 가문이 조용하기 그지없는 취옥 주가의 아가씨이지만, 가문의 이름과 그녀의 외모는 어디에서나 이야깃거리였다.
“근데 다행이네요, 운영씨. 이제 다리는 움직이는데 지장 없죠?”
그가 가져온 얼음 주머니를 오른쪽 발목에 올리고 시윤이 대수롭지 않다는 것처럼 물었다.
“팔보다 크게 다친 건 아니니 괜찮습니다. 이제 얼굴이랑 왼팔이 남았지만, 이 정도로도 무척이나 많은 신세를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에 오빠가 절대 못 나가게 할 걸요 운영씨. 지금까지 처방이 잘 맞아떨어졌으니 대제학의 목표를 어의로 바꿀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구요.”
시윤의 말에 운영이 잠깐 웃었다가 표정을 지웠다. 그의 긴급 처방이 없었다면 자신의 생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에서야 살아있으니 웃을 수 있지만, 웃으며 말할 일은 아니었다.
“바깥에 계시면 고뿔에 걸리실 겁니다. 그런데 들어오실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어쩔 수가 없군요. 제 이불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덮어드리겠습니다.”
어느샌가 다시 화제는 시윤으로 돌아와 있었고, 그 당사자는 운영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수긍했다.
얼마 안 있어 운영이 자신의 이불을 꺼내 들고 나왔다. 실은 오빠인 시호의 이불이지만, 어차피 주인도 없는 판에 누가 덮건 상관없었다. 두툼하긴 하나 따뜻함에 비례해 무거운 이불을 조심스레 그녀의 등과 어깨를 덮어주고, 운영은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운영씨?”
“궁금한 게 있는데, 답해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말입니다.”
그의 말에 어쩐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재빨리 진정시키고 시윤이 답했다.
“가능하다면, 답해드려야죠.”
“답해주실 수 있을 겁니다. 오른팔은 이제 다 나았는데 왜 굳이 발라주시는 겁니까?”
처음 질문부터 참 난관이었다.
시윤은 운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저 멀리 설산을 바라보고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버릇……. 이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몰랐어요. 불편했어요?”
“제가 말을 안 했으면 영영 모르셨을 거란 얘기군요.”
“네, 그렇게 되네요. 이제 혼자 바르셔도 되죠?”
어딘가 마음이, 조금은 섭섭했다.
시윤은 눈을 내리깔아 자신의 부은 발목만 바라보았다.
“이제… 네, 그렇군요. 이제는 혼자 해도 될 거 같습니다.”
운영은 힘없이 숙인 그녀의 눈에서 무언가를 본 것 같은 기분에, 재차 다른 질문을 꺼내 들었다.
“제 얼굴, 많이 흉측합니까?”
“얼굴요?”
“예.”
무척이나 잘생긴 얼굴이지만, 화재로 그 반은 어느 정도 화상을 입어 남은 생에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상처, 라고 시윤은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무척이나 잘생긴 얼굴’.
솔직히 말해서, ‘무척’ 이나도, ‘잘생긴’도 속하지 않는 평범한 구석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그런 운영의 얼굴에서 ‘무척이나 잘생긴’이라는 면을 발견했을까.
그녀의 숙인 얼굴 안에서, 번잡한 것들이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심각한 고민을 할 때마다 무는 입술이, 오늘도 여과없이 희생되었다.
“아뇨. 크게 화상을 입은 건 아니에요. 운영씨가 생각하는 게 어느 정돈진 모르지만.”
운영은 속으로나마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리고, 정말로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내 들었다.
“시윤 아가씨는 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선 둘 곳이 없어 발목을 보던 시윤이, 그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용수철 튕겨 나가듯 고개를 들어 운영을 바라보았다.
“운영, 씨?”
“어떤 쪽을 생각하셨길래 그러십니까?”
흔들리는 눈동자가 붙잡아주고 싶을 정도로, 위태로웠다. 운영은 곧이어 그녀의 이 놀랄만한 반응을 보고 괜한 것을 질문했다는 생각과 후회를 동시에 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으로써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될 수도 있고, 남자로서 어떠냐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시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운영을 대하느냐에 따라, 이 질문의 답은 천차만별로 갈릴 수밖에 없었다. 운영의 입장으로 보자면, 모험이었다.
“…곤란해요.”
결국 시윤이 간신히 꺼낼 수 있던 말은 네 글자의 말이었다.
“외간 남자가 외간 여자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게, 어떤 의도로 묻는 건지 알 수 없는데 답을 하라는건 너무한 거 같아요. 힘들고, 모르겠어요. 운영씨, 왜 물어본 거에요? 그 전에, 운영씨는 절 어떻게 생각해요……?”
눈물이라도 차올라 떨어질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동자. 묻지 말았어야 할 질문이었다고 운영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소용없었다. 동시에, 곤란하다고 말하며 금방이라도 울 듯한 그녀의 표정에서 운영은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마음 한 편에, 자신과 같은 마음인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번민을 거쳐 간신히 뱉은 말이 그 증거였다.
“그러면 행동으로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어떤 행동을요……?”
시선을 회피하는 그녀를 보고, 운영은 좀 더 밀착해 그녀와 앉았다. 이제 서로에게 틈이 없을 정도로 붙어앉았고, 운영은 그 상태에서 자신의 이불을 들어 시윤의 바로 옆자리에, 여차하면 숨이 닿을 거리에 앉은 꼴이 되었다. 정말로 이 상태에서 시윤이 고개라도 돌리면, 운영이 한 뼘하고도 조금 더 되는 거리에 있었다.
“…….”
“밀어내거나, 도망가지 않으시는군요.”
아무런 마음이 없다면, 당장에 밀쳐내거나 때리거나 할 텐데, 시윤은 그 상태로 굳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떤 반응은 보이고 있었다. 추위 때문에 오돌오돌 떠는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여기서,”
잠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여유가 생기고 난 후에야 그녀의 입이 열렸다.
“어떤 반응을 원하는 건데요.”
겨울 설산의 차가운 바람보다 더 차가운 냉기가, 한 자 한 자 그녀가 말할 때마다 뚝뚝 떨어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해 하는 운영이 말을 잇지 못하고, 그럴 때마다 시윤의 냉기는 마치 속담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다만 운영 입장에서는, 이건 서리고 나발이고 사람 키쯤 되는 고드름의 향연이었다.
“잠시만, 아가씨”
“들어가 주세요.”
굳었다 못해 조용한 분노가 찬 목소리에 운영은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자신이 무례했다는 것은 알지만, 이건 그간 봐왔던 시윤의 모습과는 너무도 괴리감이 컸다.
그 무례함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알면서도, 운영은 시윤의 모진 행동에서 마음의 균형이 조금 불안정해졌다.
시윤이 사랑방으로 들어간 것은 어둠이 조금 내려앉은 후였다. 운영은 어느새 잠들어있었고, 아직 저녁도 먹지 않았는데 잠들어있는 운영을 보며 시윤은 조심스레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벽이라도 짚으면 걸을 수 있기에, 조심스레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여 정주간에 다다랐다. 부엌까지는 열 걸음도 안 걸리는 짧은 거리지만, 한쪽 다리가 버거운 이상 시윤에게는 그 거리마저 무척이나 멀어 보였다.
운영이 잠깐 생각났지만, 시윤은 휘휘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그렇게 모질게 말했는데, 식사 준비를 도와달라고 하기엔 조금 내키지가 않았다. 자신은 운영을 싫어하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속하는데도 말을 꺼내면 어쩐지 도망가버릴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계속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에도 없던 모진 말로 떨쳐냈다. 마음에도 없던 마음으로 상처를 준 것 같아서, 시윤은 부엌에 다다라서도 고민했다. 자신이 무얼 하러 왔는지 까먹었을 만큼 깊게. 운영이 어느새 일어나서, 정주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로.
깊은 생각에서 헤어나온 것은 아궁이의 불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소리를 낼 즈음이었다. 무거운 장작을 들고 하나하나 넣는 일이지만 시윤은 운영을 찾지 않았다. 자신의 발이 아픈데도, 부를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처럼 익숙하게 혼자 쌀을 씻고, 반찬의 간을 보고, 김치가 짠지 안 짠지 고민했다.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 있는데, 그다음을 어찌해야 할지 시윤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꾸만 생각이 다른 길로 새니 저녁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시래깃국은 소금간을 아무리 해도 싱거울 정도로 물이 많았고, 밥도 마찬가지로 물이 많은데 밑바닥이 탄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걸 어떻게 떠먹고 치웠는지 시윤의 생각에선 아무런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운영은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지만 도와주면 안 될 것 같아 계속 내버려두고, 식사가 엉망진창이 되었어도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생각도, 저녁 식사도 정리가 된 건 시윤이 어떻게든 설거지까지 하고, 유일하게 불이 들어오는 사랑방에 돌아왔을 즈음이었다.
“들어갈게요.”
힘없는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리고, 운영은 주섬주섬 화상 부위를 보고 있다가 무심하게 들어오라고만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비명.
“꺄아아악! 운영씨!! 얼른 옷! 옷 입어요!”
남녀칠세부동석은 사라진 지 좀 되긴 했지만, 워낙 이런 쪽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시윤다운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바지까지 벗고 있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하반신은 이불로 잘 덮고 있었고, 그저 저고리와 속저고리를 벗었던 것뿐이었다.
문이 부서져라 쾅 닫을 정도로 반응하는 시윤의 부탁을 평소라면 들어줬겠지만, 오늘은 유감스럽게도 운영에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결판을 내고 싶었다. 아무래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원래의 자신도 이런 승부욕이 있는 모양이라고 운영은 생각했다.
열어젖혀 진 문소리에 바로 옆에서 기다리던 시윤이 고개를 돌려 사랑방 안쪽으로 시선을 돌아봤지만, 시윤이 바라던 옷 다 입은 운영의 모습이 아니라, 아까와 똑같은 상황이라 시선이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빙빙 주위만 돌아다녔다.
“왜… 왜 옷 안 입었어요! 추, 춥게!”
“추우니 얼른 들어오시라는 의미입니다만, 아가씨.”
일부러 목소리에 감정을 싣지 않은 채 운영은 시윤의 손목을 잡고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바깥은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손이 아니라 손목을 잡았는데 그녀가 느낀 찬기는 고스란히 운영에게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해 본 운영이 사랑방 제일 따뜻한 아랫목, 즉 자신이 자는 이부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손목을 놓지 않았으니, 시윤은 거의 반강제적으로 운영의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시윤이 한 번 헛기침하면서 눈치를 줬지만, 운영은 시윤만 보고 있을 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평소의 운영과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이라, 시윤도 속으로 적잖이 놀랐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왜 그래요 도대체?”
결국 처음 말을 꺼낸 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시윤이었다.
“뭘 말입니까?”
시윤의 손에 가득했던 한기가, 바닥의 따뜻한 기운 덕에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아니 잠시만 그 전에, 옷 좀 입어요 제발! 도대체 눈을 어디다가 둬야 할지 모르겠다구요!”
“괜찮지 않습니까. 상처가 어떤가 확인 좀 해보려고 한 건데. 이왕 된 거 붕대 좀 풀어주시겠습니까. 얼굴 쪽도 다.”
그러고 보니 시윤은 오늘 붕대를 갈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아물었다고 보기엔 어려운 상처라 계속 갈아줘야 하는데, 오늘 하필이면 의원이 문을 닫아서 쓰던 붕대를 오늘 것만 새로 빨아 방 안에 놓긴 했었다.
그리고 계속 까먹고, 운영이 이제야 말해 생각난 것이다. 시윤 입장에서는 이게 다 실은 운영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럼 진작 좀 말하지 그랬어요. 알았어요. 도와줄게요.”
운영이 괜히 그런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시윤은 순순히 운영의 부탁에 조금 더 운영에게 붙어 앉아 붕대 한쪽 끝을 잡고 풀기 시작했다.
건장한 남자의 몸이라 그런지 몇 번을 돌려도 끝이 없을 듯하던 붕대의 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드러나는 흉측한 상처들이 그 대화재의 끔찍함을 보여주듯, 운영의 왼쪽 상체를 지배하다시피 보였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상체의 붕대를 다 푼 후 얼굴 쪽도 더 풀어야 했다.
시윤이 무릎을 세워 운영의 눈높이보다 조금 더 높게 앉았다. 운영이 찾아준 상체의 붕대 끝과 달리, 얼굴은 찾기 어려워서 몇 번 끙끙대다가 간신히 벗길 수 있게 되었다. 시윤은 붕대를 벗기는 데 온 신경을 다해 정신이 없는데, 운영은 반대로 시윤의 고의가 아닌 손길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고의가 아닌데, 순전히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 이러는 거라면 도대체 ‘마음’이 있을 때는 어떤 느낌일지 상상도 가질 않았다.
그렇게 전신의 모든 붕대가 다 풀려나갔다. 거의 왼쪽에 치중된 화상이 정상적인 오른쪽과 비교되어서, 시윤의 눈에는 늘 이 사람이 화상 전에는 어떻게 생겼었는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게 상처가 입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 심지어 대화재를 일으킨 장본인일지도 모르는 사람. 자신에 대해서 기억하는 건 하나도 없는 주제에, 짓궂은 짓은 잘도 하는 사람. 이렇게 보면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붕대 가져올게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시윤이 저 구석에 놓은 새로 빤 붕대를 가지러 가려고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네?”
“지금 이 모습은 어떠냐고 묻는 겁니다.”
여전히 어떤 감정도 없이 말하는 운영.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당황하기 시작한 시윤.
도망치듯 그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는데, 시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좋은 모습은 아니에요. 상처잖아요.”
새살이 돋아도 남을 붉은 피부. 자칫 잘못했다면 심장까지 타버려서, 죽었을 수도 있는 중상.
누구나 처음 그 모습을 보게 된다면, 괴물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로 그의 상태는 무척이나 심각했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나아진 것은 부러졌던 다리가 붙은 것. 그리고 그 간 운영을 봐온 시윤만이 알 수 있는 상처의 아문 정도.
“일단 약 가지고 올게요. 얼른 나아야 하잖아요. 그래야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형식적인 대답에 진이 빠진 건 운영이 아니라, 오히려 그걸 말한 시윤이었다.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겨우 이딴 말을 내뱉으려고 한 게 아니었다.
“아니, 아닌데.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시윤이 운영의 헌 붕대들을 조심스레 주우려고 했지만, 그걸 막아선 건 운영의 손이었다.
“그럼 무슨 말을 하려고 하셨습니까.”
아까와는 달리 조금의 감정이 뒤섞였지만, 좋은 감정이 아닌 게 보이는 말이 운영에게서 나왔다.
혼란스러워하는 시윤을 더는 운영은 기다리지 않았다. 제지하고 있는 손과는 다른 손에 건방지게도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강제로 자신을 보게 했다.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거리지만 시윤의 눈에 정면으로 들어온 것은 운영의 얼굴, 그 전부였다.
“그러니까, 아까는 미안하다는 말을, 했어야 하는데, 미안해요.”
그렇게 온 신경이 다 가 있도록 신경 쓴 생각을 이제야 내뱉자, 긴장이 조금은 풀렸는지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맺혔다.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요. 미안해요. 무례한 건 나였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질 몰라서…….”
굳어있던 운영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실은 누그러졌다기보단, 자신이 사과해야 할 일을 시윤이 사과하는 이 상황이 웃겨서 허무함에 풀어진 거였다.
눈물방울이 하나, 하나 떨어졌다. 비단결같이 고운 마음이란 말이 운영의 무의식에서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너무도 중요한 기억이 그의 뇌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 아가씨와 얘기가 오가고 있다. 수영이 너도 알 거다. 취옥 주가의 아가씨…]
[조만간 그 아가씨와 만날 것 같구나, 수영아. 무척이나 어여쁘다고 하던데. 이름도 참 좋은 이름이었지. 날개 시에 수레바퀴 윤을 쓴다 했던가. 하늘도, 땅도 어느 곳에서든 좋은 이름 아니니.]
[혼수로 이 비단이면 좋겠는데, 어떻겠냐. 시윤 아가씨를 먼저 본 같은 사내 입장으로썬, 이 비단결만큼 고운 마음씨를 가진 아가씨인 것 같아서 말이다.]
“날개 시… 수레바퀴 윤…….”
“네?”
울다가 자신의 이름을 묻는 그의 말에 시윤이 반응했지만, 운영은 멍하니 중얼대다가 맞춘 것같이 말하고 있는 처지였다.
“맞습니까, 아가씨의 이름이?”
“네, 맞아요. 그렇게 쓰는데…….”
중요한 것들이 갑작스레 돌아오자 혼란스러울 만도 한데, 운영은 시윤의 턱에 받쳤던 자신의 손을 조심스레 빼고 입을 열었다.
“혹시, 단야 류가란 곳과 혼담이 오갔습니까?”
“네? 아, 네. 그랬었죠. 운영씨가 발견된 거기가 단야 류가니까.”
“그 상대는 누군지,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쭤도 됩니까?”
“나무바다…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하고 있어요. 류수영, 나무 수에 바다 영.”
[단야 류가, 류수영榴樹瀛. 그게 네가 앞으로 살아가는 날 필요한 너의 자존심이자, 너의 전부란다.]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자 인연이었다.
근 세 달을 돌고 돌아서, 이제야 찾은 기억 속에서 찾아낸 마지막 남은 소중한 사람. 혼담이 오가면서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모든 걸 잃고 나서야 자운영이란 이름으로 이제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우, 운영씨? 왜 그래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잠시만, 잠시만 좀 웃고요. 하하하하하하하!!”
죽을 뻔한 걸 구한 것도 자신의 얼굴도 모르는 정혼자. 그리고 그 얼굴도 모르는 정혼자를 지금은 얼굴도, 같이 살기까지 해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점에서 운영, 아니 수영은 무척이나 운이 좋은 셈이었다. 화재로 모든 가족을 잃었는데도, 자신만이 살아남은 건 분명히 이 사람 때문이었다. 소중한 이들을 다 잃었지만, 새로운 소중한 사람을 찾았고, 그 이유로 자신이 유일하게 산 것 같아서 수영은 울음이 아닌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몇 분이나 웃고 나서야 수영은 웃음을 그쳤다. 시윤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에, 심지어 궁금해 죽겠다는 것까지 다 드러난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제야 수영이 입을 열었다.
“정혼자들끼리 우연하게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경험은 우리가 처음일 겁니다. 이제야 뵙는군요, 시윤 아가씨. 정혼자 류수영입니다.”
“…기억을 찾았군요.”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주워와 치료해주고,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자신의 정혼상대였다는 사실에 시윤은 매우 놀란 기색이 없었다. 애초에 류수영이란 존재가 시윤에게선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이런 경우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하지만 이제 어쩌실 겁니까, 시윤 아가씨.”
“아마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에요.”
시윤이 수영을 바라보았다. 운영일 때와 별 차이가 없지만, 아까의 솔직함으로 인해서인지 시윤의 표정은 조금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눈물 자국이 볼에 남아있지만 않다면 조금 더 예뻤을 텐데, 지금의 모습도 수영의 시선에서는 어쩐지 빛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처럼 붕대를 갈아주고 치료하고 밥을 해주고. 다리는 나았으니 이제 산책도 조금 할 수 있겠죠? 똑같아요.”
“아가씨… 아, 계속 부르던 호칭이 이러니 입에 붙는군. 시윤씨다운 답이라 좋긴 한데……. 그렇다면, 정혼 문제는 어쩌실 겁니까?”
시윤이 잠깐 고민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서 미처 가져오지 못했던 붕대를 가져왔다. 다시 얼굴에 새로 붕대를 감아야 하므로, 서로가 마주 볼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단야 류가가 실질적으로 수영씨 한 분밖에 계시지 않으니 무효가 될 확률이 높지요. 아까같이 솔직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대답을 바랐다면 이 정도가 대답이 될 테지만.”
새 붕대를 감으며 어느새 얼굴 왼편에 상처가 많이 아문 것이 눈에 보여서인지 시윤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미소를 지었다.
“붕대 묶어줄게요.”
홀려버릴 듯한 미소에 넋을 놓았다가 정신을 차리자, 수영의 눈높이 위에 있던 시윤은 어느새 약간 밑으로 내려와 상체의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상처 부위가 부위라 어쩔 수 없이 거의 안은 자세로 조심스레 묶는 게, 전에도 그랬지만 수영은 지금 더 두근거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중간 중간에는 뜻밖에 발육이 좋은 그녀의 가슴에 자꾸만 닿아서, 고간이 근질근질해지기까지 했다.
“수영씨는 어떤데요? 무르고 싶나요?”
아무런 의도도 없는 그녀의 말인데, 어쩐지 수영으로선 선택을 재촉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대충 다 감아졌다고 느낀 그 순간 수영은 주저 없이 시윤을 꼭 안았다. 작은 체구인 탓에, 그리고 워낙 강하게 끌어당긴 탓에 시윤은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대로 안겨버렸다.
“아까 일은 오히려 이쪽이 사과해야 하는데 선수를 쳤더군요.”
“그런가요… 하지만, 수영씨한테 잘못한 게 없는 게 아니니까…….”
조심스럽게 팔을 꺼낸 시윤이 수영의 등을 살짝 끌어안았다. 부드럽게 끌어안은 것뿐인데도, 수영에겐 무척이나 자극적이기 그지없었다.
“이것마저 거부하면 접으려고 했는데 그럴 것까진 없어 보이는군요.”
“장난삼아서 할 사람이 아닌 걸 아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모질었던 겁니까?”
고개를 숙인 시윤의 얼굴에, 어느새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분명히 하고는 할 테니, 잘 들어줘요.”
수영이 그게 뭐냐고 물어보려는 차에 시윤이 재차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고 하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내 마음이 너무 커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이 지금의 상처로 흉측해져 있는 것과 당신 본연의 모습은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읍!”
“시윤씨, 그다음은 먼저 할 거라서.”
다시는 순서 뺏기고 싶지 않거든, 이라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 후 수영이 말했다.
“결혼해줘요. 정식으로 부탁하는 거니까.”
수영이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시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워 하는 게 눈에 다 보일 정도로 붉어진 얼굴로,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혼 관계랑은 별개의 얘깁니다. 이거.”
“네, 알아요.”
“가락지는 나중에 해줄 테니 너무 섭섭해하지도 않는 겁니다.”
“바라지도 않았는걸요.”
입가를 손으로 감추며 웃는 시윤의 모습에, 단순히 그녀의 웃는 표정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수영은 그녀의 손을 치우고, 그녀의 촉촉해 보이는 입술이 이어 눈에 들어오자 아무런 생각없이 그대로 입을 맞췄다. 처음 한 입맞춤에 놀랄 법도 하지만, 시윤은 자신이 놀라면 수영이 더 놀랄 것 같아 그가 입 맞추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길고 긴 입맞춤은 수영이 입술을 떼면서 끝이 났다. 온기 때문엔지, 혹은 분위기 때문인지 알 수 없게 달아오른 볼이 새빨갛지만 시윤은 그쪽으로 신경이 가질 않았다. 부드러웠던 입술과, 곧이어 조심스레 들어와 입안의 치열을 고루 거치고 지나가 맞닿은 혀, 부드러웠다가 거칠어졌다가, 다시 부드러워진 입맞춤이 신기하고, 기쁘고, 여하튼 온갖 기분이 다 섞인 것 같았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수영은 시윤을 자신의 이부자리로 끌고 들어갔다. 늘 같은 방의 제일 찬 윗목에서 자게 했던 것도 미안하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시윤이 원한다면, 정사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같이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다만 지금의 시윤의 눈빛은, 그 이상을 원하고 있었고, 수영은 그것을 읽었다.
이듬해 봄, 단야 류가의 마지막 생존자인 류수영과 취옥 주가의 주시윤이 정식적으로 혼인을 올렸다.
혼인 전 이미 아이가 있었기에 혼전임신 상태였고, 두 부부가 사이좋게 과거에 급제한 날 이 아이가 태어났다.
그게 어느새 10년도 더 된, 지금은 30대 중반이 된 두 부부의 오래되었다면 오래된 기억이었다.